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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공부/한국사

을미사변의 배경과 원인, 전개와 결과

by naridawm 2024.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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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10월 8일, 일본이 명성황후(민비)를 시해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조선 후기 동아시아 국제 정세화 내부 권력 다툼 속에서 발생했으며, 조선의 독립성과 주권을 크게 위협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습니다.

 


배경과 원인

 

(1) 국제 정세 변화와 조선의 위기

  • 19세기 후반 동아시아는 강대국 간의 패권 경쟁이 심화된 지역이었습니다.
  • 조선은 지리적으로 청나라, 일본, 러시아와 접하고 있어 이들의 전략적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 청일전쟁(1894~1895) :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계기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일본과 청나라가 충돌하면서 발생한 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여 청나라의 영향력을 축출하고 조선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게 됩니다.
  •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을 통해 조선을 `독립국`으로 선언했지만, 이는 실제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기보다는 일본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명분이었습니다.
  • 하지만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열강(삼국간섭 :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일본의 랴오둥 반도 점령을 막으면서 일본은 국제적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서의 우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더욱 강력하게 개입하려 했습니다.

(2) 조선 내부의 권력 갈등

  • 명성황후(민비) : 고종의 왕비로, 당시 국왕보다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력이 컸습니다. 명성황후는 일본의 간섭을 견제하고 조선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강대국과 협력하는 외교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 일본의 위기감 : 일본은 명성황후가 추진하는 친러 정책을 조선 내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했습니다.
  • 김홍집 내각 : 을미개혁을 주도한 김홍집은 일본의 후원을 받는 친일 개혁파였습니다. 이들은 일본의 지지를 기반으로 개혁을 추진했지만, 명성황후와 대립하며 정부 내 권력 다툼이 심화되었습니다.

(3) 을미개혁에 대한 반발

  • 을미개혁(1895년) :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압력으로 김홍집 내각이 단행한 개혁입니다. 주요 내용은 단발령(상투를 자르게 하는 정책), 신식 군제 도입, 과거제 폐지 등이었으며, 급진적이고 서구화된 개혁이었습니다.
  • 보수층과 민중의 반발 : 조선의 유생(유학자)과 전통적인 사회 질서를 중시하던 사람들은 을미개혁을 민족적 정체성과 전통을 훼손하는 행위로 간주하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이루 인해 사회적 갈등과 혼란이 증폭되었습니다.

 


사건의 전개

 

(1) 일본의 계획 수립

  • 미우라 고로의 역할
    - 당시 조선에 주재하던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명성황후가 러시아와의 연대를 통해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움직임을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습니다.
    - 미우라는 조선의 정세를 일본에 유리하게 바꾸기 위해 명성황후를 제거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 사전 준비
    - 일본 공사관은 일본군 병력과 민간 낭인(실직 무사)을 동원해 경복궁 습격을 준비했습니다. 일본은 이를 내부 문제로 위장해 국제적 비난을 피하려 했습니다.
    - 미우라는 자신이 직접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수립했으며, 습격 당일 군사와 낭인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2) 1895년 10월 8일, 경복궁 습격

  • 일본군과 낭인의 침입
    - 사건은 새벽에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과 낭인들은 경복궁의 주요 출입로를 통해 강제로 침입했습니다.
    - 조선 경군은 일본군과 낭인의 무력 앞에서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거나 겁에 질려 물러났습니다. 이는 조선의 군사력이 이미 상당히 약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
    - 일본 공사관과 군 지도부는 현장에서 낭인들을 직접 지휘하며 명성황후를 찾아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들은 명성황후의 처소인 건청궁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 명성황후의 최후
    - 일본군과 낭인들은 건청궁에 난입해 궁궐 내부를 수색했습니다. 당시 명성황후는 시녀들과 함께 있던 중이었으나, 낭인들은 시녀들을 폭행하며 명성황후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 명성황후는 숨으려 했으나 끝내 일본군과 낭인들에게 발견되었습니다.
    - 낭인들은 명성황후를 끌어내어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그녀의 신체는 훼손되었고, 시신은 궁궐 내 정원에서 불태워졌습니다.
    - 당시 일본군과 낭인의 행위는 단순히 암살에 그치지 않고, 조선 왕실의 권위와 상징을 철저히 짓밟기 위한 의도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태운 것은 조선 왕실에 대한 극도의 모욕 행위로 간주됩니다.

(3) 사건 직후의 상황

  • 조선 왕실과 고종의 반응 : 고종의 무력함
    - 사건 당시 고종은 경복궁 내에 있었지만, 일본군과 낭인의 위협 속에서 사실상 억류된 상태였습니다.
    - 고종은 명성황후의 죽음을 알게 되었으나, 일본의 압력과 내부적 혼란으로 인해 즉각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습니다.
    - 왕실은 명성황후의 죽음을 외부에 알리지 못했고, 사건을 은폐하려는 일본의 강요에 따라 침묵을 지켰습니다.
  • 일본의 의도적 은폐
    - 일본의 사건 왜곡 : 일본은 을미사변을 단순한 내부 반란 또는 정치적 정변으로 보이게 하려 했습니다. 일본 공사관은 사건의 진상을 감추기 위해, 당시의 조선 정부와 일부 친일 세력을 동원해 명성황후의 사망을 자연사로 위장하려 했습니다.
    - 국제적 책임 회피 : 일본은 이 사건을 공사관 주재 일본군과 일부 낭인의 자발적인 행동으로 몰아가며 일본 정부의 개입 사실을 부정했습니다.

(4) 경복궁 내의 공포와 혼란

  • 궁궐 내 조선 관료와 관리들의 반응
    - 일본군과 낭인의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선의 관료들은 두려움에 침묵하거나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 명성황후를 지지하던 세력은 사건 이후 크게 위축되었고, 친일 세력들이 정부의 주요 자리를 차지하며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 궁궐 내부와 민중의 혼란
    - 사건의 잔혹한 성격은 경복궁 내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남겼습니다.
    - 민중 사이에서도 소문이 퍼지며 공포감과 함께 일본에 대한 분노가 점차 고조되었습니다.

 


결과와 영향

 

(1) 조선 정치의 혼란

  • 명성황후의 죽음 이후 조선은 일본의 지배 아래 놓였습니다.
  • 고종은 명성황후를 잃고 일본의 압박에 굴복해야 했으며, 조선 정부는 실질적인 주권을 상실한 상태에 가까워졌습니다.

(2) 반일 감정 고조와 의병 운동

  •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 을미개혁에 대한 반발로 을미의병이 발생했습니다.
  • 의병들은 조선의 전통을 지키고 일본의 간섭을 배격하려는 민중운동으로,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습니다.

(3) 국제적 비난과 일본의 외교적 위기

  • 을미사변의 잔혹성과 일본의 개입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제 사회에서 일본은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 일본은 사건의 책임을 당시 일본 공사였던 미우라 고로와 현장 지휘자들에게 떠넘겼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 정부가 사건을 묵인하거나 지지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4) 조선의 러시아 의존 심화

  • 고종은 일본의 위협을 피해 1896년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는 조선이 일본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러시아의 내정 간섭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역사적 의의

 

(1) 일본 제국주의의 본격화

  • 을미사변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한 사례로, 이후 일제강점기의 전조가 된 사건입니다.

(2) 반일 민족운동의 촉진

  • 민중 사이에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민족의식이 강화되었으며, 이는 훗날 독립운동의ㅣ 정신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3) 조선의 독립과 근대화의 어려움

  • 을미사변은 조선 정부가 국제 사회에서의 입지를 잃고, 내부적으로는 정치적 혼란과 국왕의 권위 약화를 겪으며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의 역사에서 주권 상실의 비극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