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배경과 흥선대원군의 등장
19세기 중반 조선은 국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부정부패, 세도정치, 삼정의 문란(전정·군정·환곡)이 심화되어 민생이 극도로 피폐했고, 외부적으로는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탈 위협이 현실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철종 사후 어린 고종이 즉위하자,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하응)**이 섭정으로 정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선의 국권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개혁과 보수적 외교정책을 동시에 추진했습니다.
개혁 정책과 쇄국 기조
흥선대원군은 초기에 비교적 강력한 개혁 정책으로 민심을 얻었습니다. 대표적인 개혁 조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 서원 철폐: 전국 수백 개의 서원 중 약 600여 개를 철폐하며 향촌 사림의 세력을 억제하고 국가 재정을 강화.
- 호포제 실시: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여 조세 부담의 공정성 확보.
- 경복궁 중건: 국왕 권위 회복을 명분으로 270여 년 만에 궁궐 중건, 국가 통합 상징.
하지만 이와 동시에 흥선대원군은 대외적으로는 **쇄국정책(문호폐쇄정책)**을 고수하였습니다.이는 외세의 위협에 대한 방어적 조치이자, 전통 유학 질서를 유지하려는 보수적 대응이었습니다.
주요 사건과 관련 인물
쇄국정책은 단순한 외교 거부가 아니라, 무력 충돌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낳았습니다.
- 병인박해(1866): 프랑스 선교사와 천주교 신자 수천 명을 처형하며 외교 문제 촉발.
- 병인양요(1866): 병인박해에 반발한 프랑스군이 강화도 침략. 문수산성에서 한성근, 정족산성에서 양헌수가 항전하여 퇴각시킴.
- 신미양요(1871):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후 보복으로 미국군이 강화도를 침공. 어재연 장군이 광성보에서 결사항전.
흥선대원군은 이 모든 사태에 대해 “통상은 곧 망국”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며, 척화비(斥和碑)를 전국에 세워 외세 배격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쇄국정책의 의의와 비판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 긍정적 평가:
- 제국주의 침탈이 본격화되기 전, 주권 수호에 일조한 점.
- 국내의 부패 세력을 억누르고 재정 안정을 꾀한 시도.
❌ 부정적 평가:
- 일본과 서양이 근대화를 추진하던 시점에, 조선은 외부와의 단절로 근대화의 기회를 상실.
- 서양 세력의 위협을 무력으로만 대응하면서, 조선의 국제적 고립 심화.
- 대원군 퇴진 이후 조선은 개항 압박에 무방비로 노출됨.
퇴진과 이후의 영향
흥선대원군은 1873년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언하면서 실각하게 됩니다. 이후 조선은 일본과의 강화도조약(1876) 체결을 통해 본격적인 개항과 근대화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지만, 준비 없이 개방된 조선은 외세에 휘둘리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단기적으로는 국권 수호에 기여했지만, 장기적으로는 근대 문명과의 접촉을 차단하여 역사적으로 ‘기회 상실’이라는 오명을 남긴 선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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